[비즈인천] “마을을 기록하지 않으면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남기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됩니다.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배다리를 꾸리고 싶습니다. ”
이철완 배다리 주민협의회장이 밝힌 각오다. 인천 동구 배다리 마을은 그에게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쌓인 골목이고, 사람들의 얼굴과 이야기가 남아 있는 삶의 터전이다.
그는 배다리를 ‘인천의 어머니 같은 곳’이라고 표현한다. 근대 인천의 출발점이었던 이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 확립이 곧 도시의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배다리는 인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에 형성된 원도심 마을로, 헌책방 거리와 문화예술 공간이 자리한 인천 근대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다.
 |
| 이철완 배다리 주민협의회장. 출처=비즈인천 |
이철완 회장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대전대학교 부속 한방병원 병원장, 한국노인병연구소장, 한국노년의학회 회장, 대한한의학회 수석 부회장 등을 역임한 의료·학술계 원로다. 오랜 기간 외지에서 의료와 학술 활동을 이어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향 배다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배다리에서 나고 자란 뒤 타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며 “배다리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자, 그곳에서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고 싶은 고향이었다”고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다시 보인 배다리 마을의 의미
지난 2017년, 이철완 회장은 그렇게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연로한 아버지가 불편해지면서, 가까운 곳에서 돌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한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운영하던 한의원을 정리하고, 배다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철완 회장은 “어린 시절에는 익숙했던 골목과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부모님 세대가 이 마을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또 어떤 변화 속에 놓여 있었는지 더 또렷하게 보였다”며 “배다리는 단순히 오래된 동네가 아니라 인천의 근대 문화와 출판, 예술이 싹튼 공간이다. 인천의 뿌리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배다리가 근대 인천의 중심 역할을 해왔기에 송도와 청라, 영종 등 신도시로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토박이들이 떠나고 마을의 상징성이 조각나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 이철완 배다리 주민협의회장. 출처=비즈인천 |
그는 이어 “사람이든 도시든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고 그 이야기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가 후대에 제대로 전해진다”며 “내 자식과 손자들에게 배다리가 어떤 곳인지 설명할 수 있도록,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지역의 정책과 방향을 함께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철완 회장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지역 활동으로 이어졌다.
주민이 주도하는 마을 운영 구조를 만들다
그는 2019년부터 배다리 주민자치회 활동에 참여하며 약 4년간 지역 현안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외부에서 쌓아온 의료·학술 현장의 경험을 지역 문제에 접목하며 마을 운영 구조의 빈틈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철완 회장은 “마을 안에는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중간에서 구심점을 잡고, 좋은 의견들이 흩어지지 않게 모아줄 역할이 필요하다”며 “그러다가 2023년, 동구청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지역 문제를 풀어가는 민간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제안하면서 주민들과 논의를 거쳐 배다리 주민협의회가 출범했다. 다만 초기에는 축제 준비와 같은 특정 사안이 있을 때만 간헐적으로 회의가 열리며 협의회 활동이 점차 침체되는 상황도 겪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회장직을 수락한 그는 침체된 주민협의회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구조부터 손봤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주민 역량을 키우는 강연과 토론을 진행해 협의회 모임이 실질적인 ‘의견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되도록 방향을 잡았다.
‘숭의지하차도 상부 공간 개발’과 ‘주민 전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를 설계할 기회
올해는 그동안의 논의를 바탕으로 보다 분명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일례로 주민 참여를 적극 유도하기 위해 이달에는 도시계획 분야 전문가를 초청해 숭의지하차도 상부 공간 활용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
| 숭의지하차도 개발 구간. 출처=인천시 |
이철완 회장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어렵게 배다리 관통도로를 숭의지하차도로 바꿔 상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일부 시설에 주민 커뮤니티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건축 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해 마을의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배다리 주민협의회장으로서 전문가와 주민이 머리를 맞대는 장을 지속해서 마련할 것이다. 주민들이 관과 시공 업체가 협의해 내놓는 결과물을 수동적으로 청취해서는 곤란하다. 결국 새로 지어지는 시설물에서 생활하고 활용하는 주체는 주민이기 때문이다. 배다리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마을에 지어지는 시설물은 그 역사와 문화에 어울리는 모습이어야 한다. 배다리에 들어설 새로운 공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공간이 되도록 회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부공간 개발이 완료되면, 주민 누구나 공원에 모여 배다리 마을 발전 방향을 이야기하는 열린 토론이 열리도록 유도하겠다. 닫힌 실내가 아닌 주민이 항상 오가는 공원이나 마을에서 생활과 밀접한 여러 사안을 논의하고 답을 도출하는 게 진정한 주민소통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배다리주민협의회는 오는 4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전시회, ‘배다리문화역사마을 주민소장 기획전 – 배다리, 기억의 곳간을 열다(가칭)’도 준비 중이다. 이 전시는 주민들이 간직해온 물건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
| 이철완 배다리 주민협의회장. 출처=비즈인천 |
이철완 회장은 “배다리는 풍성한 이야기를 지닌 마을이다. 따라서 주민들이 간직해온 소장품과 그에 얽힌 사연을 함께 전시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며 “’저 집에 이런 사연이 있었나’, ‘이 물건에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나’ 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마을과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물건이 전시되면 가족들이 찾아오고, 자연스럽게 이웃의 전시도 함께 보게 된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동네를 화합시키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배다리는 추억으로만 남겨둘 공간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며 관계를 형성하는 마을인 만큼, 변화의 방향 역시 기억과 정체성을 지우는 것이 아닌 축적하고 이어가야 한다”며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잘 정리하고 연결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과거를 정리하지 않으면 현재도, 미래도 설계할 수 없다. 앞으로도 주민협의회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를 그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